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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을 걷다 ]/깨어있기

외력에 의한 정체의 형성

낮은 바다 2016. 12. 1. 23:08

1.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한 장면이다. 케빈은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들어찬 체육관의 입구를 몰래 자물쇠로 잠근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로 올라가 활을 난사해 수십 명을 죽인다. 수많은 영화에 인상 깊은 장면이 많았지만 나는 뒤이어 나오는 이 장면을 잊지 못한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많은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의 한가운데서, 피비린내가 낭자한 현장을 뒤로하고 케빈은 유유히 걸어 나온다. 복수의 대상인 엄마를 제외한 모든 가족도 죽인 후였다. 어떤 인간이 그토록 강력한 파괴 열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케빈은 그 모든 일이 끝나고 엄마와 대면한 자리에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한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는 것이다.

 

 

▲ 사람들을 죽인 후 체육관에서 유유히 걸어나오는 케빈

 

 

전혀 다른 결론의 영화지만, 실은 <굿 윌 헌팅>의 주인공 윌 또한 케빈과 비슷한 면이 있다. 윌은 모든 권위적인 것들에 대한 반발이나 회피로 살아간다. 삶을 놔버린 듯한 동네의 불량한 친구들 틈에 섞여들고, 월등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학교는 권위적인 느낌 때문에 애초부터 피해온 까닭에 교육조차 거의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처럼 반발이나 회피로 일관하며 살아가는 배경에는 먼저 자신을 파괴했던 엄마와 아빠가 있었다. 케빈의 엄마는 결혼 이후의 불행해진 삶 때문에 가장 약할 때의 어린 케빈을 방치했고, 윌의 아빠는 가학적인 아동학대 부모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한 둘의 특징은 마음속 깊숙이서 끓어오르는 반발의 힘에 자아를 내맡긴 채 살아간다는 점이다. 때로 그것이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이 무언가를 깨부수려는 격렬한 충동으로 나타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끓어오르는 반발과 파괴의 힘을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삶 자체다. 이것이 척력(밀어내고 반발하는 힘)에 의한 정체의 형성이다. 

 

2. 

 

반대의 인물들도 있다. 영화 <머드>의 주인공 머드는 아름다운 주니퍼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주니퍼는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머드를 취했다가, 다시 누군가 나타나면 버리는 일을 반복한다. 주니퍼에게 머드는 잠깐씩 외로움을 해소해주는 자위 도구에 불과한 존재다. 

 

하지만 머드는 주니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주니퍼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겁을 먹은 머드는 마을 근처의 섬으로 도망치지만, 거기서도 다시 주니퍼에게 돌아갈 언젠가를 벼른다. 머드의 삶은 전적으로 주니퍼에 대한 강력한 인력(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규정된다. 이것이 바로 인력에 의한 정체의 형성이다. 

 

 

▲ 머드

 

 

우디 앨런의 영화 <블루 재스민>에는 다른 듯하지만 비슷한 주인공 재스민이 있다. 두 자매를 대비해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언니 재스민은 부자 남편과 결혼해 그 재력과 명예로 동생을 무시하고 호화롭게 살아온 인물이다. 하지만 그 신기루가 무너져내린 후에도 허영을 멈추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서도 비행기 1등석을 타고 다니고, 열심히 사는 동생에게 찌질한 남자를 만나지 말라며 훈계를 늘어놓는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껍데기를 그럴듯하게 꾸며 주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끌어모으는 인기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다. 이것 또한 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불특정 다수의 타인에 대한 끌어당김만으로 살아가는 인격으로서, 인력에 의한 정체의 형성이다.[각주:1] 

 

앞서 살펴본 두 가지 외력, 즉 인력과 척력에 의한 정체의 형성은 현대인들의 인격 형성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두 가지 패턴이다.

 

3. 

 

반면 드물지만 인력이나 척력 같은 외력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자신에 의해 자기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뮤지컬 <킹키부츠>의 로라는 여성의 정체성을 가진 생물학적 남자, 하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내세우는 사람이다. 사실 로라야말로 인력과 척력의 힘으로 살아가기 쉬운 삶이었다. 자신을 이상하다고 괴롭힌 사람들에 대한 반발감과 복수심으로 살아가거나, 자신의 본질을 완전히 억압한 채 유년기에 얻지 못한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긁어모으는 인력에 의해 정체를 형성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라는 그 두 가지 힘을 모두 거부하고 고통스러운 자기 형성의 길을 간다. 여장을 하고 가다가 길거리에서 테러를 당하거나, 의욕적으로 구두 디자인 일을 시작하고서도 공장 직원들한테 노골적으로 따돌림당하기도 하지만, 그는 조금씩 흔들리면서도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인력으로 살아왔던 찰리와, 자신과 다른 것들에 대한 배척과 혐오로 살아온 돈이 자신을 찾는 것을 돕는다.

 

 

▲ 미국에서 공연된 킹키 부츠. 흑인 배우가 로라(가운데)를 맡아서 그의 소수자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4.

 

그렇다면 가상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아닌, 현실의 내가 자기에 의해 정체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해 볼 수 있을까. 간단하다. 내가 생산하는 것과, 내가 맺어가고 있는 관계를 보면 된다. 한 인간이 생산하는 것과 관계맺는 것은 정확히 그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권위에 대한 척력으로 사는 사람은 인정할만한 정당한 권위에도 신경증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인정해주는 또다른 권위와 관계 맺으려는 강박을 갖고 움직일 것이다. 반면 인기, 즉 사람들에 대한 인력이 존재 이유인 사람은 맺어가는 관계에 아무런 공통적 색깔도 없이, 얕더라도 가능한 넓은 관계를 맺어가는 데 주력할 것이다.

 

생산은 좀 더 본질적으로 그의 정체를 드러낸다. 여기서 생산이란, 글을 쓰든 요리를 하든 기획을 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든, 자신의 노동을 통해 직접 만들어내어 타인에게 영향을 주게 된 모든 유무형의 결과물을 뜻한다.

 

다만 인력에 의해 자기를 형성하는 사람은 생산물을 내놓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 한다. 거기에 자신도 모르게 담긴 자기 색깔에 의해 누군가로부터 배척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완벽주의자’라고 칭하며 생산물을 다듬고 고치느라 약속을 자주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인력에 의해 정체를 형성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해봐도 좋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완벽주의자라기보다는 자신만 빛날 생각에 골몰하는 이기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5. 

 

척력에 의해 자기를 형성하는 사람 또한 생산물에 일정한 색깔을 담기 어렵다. 그는 무언가에 반발하는 강력한 마음의 에너지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얼핏 보면 색깔이나 철학이 명확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무엇에 ‘반대’하는 일 외에, 어떤 꿈을 꾸고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검토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쉽게 그의 빈약한 자아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에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어쨌든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인간이 끌어올릴 수 있는 에너지 가운데, 내가 본 가장 강력한 에너지는 숭고한 인간애도 피 끓는 사랑도 아니었다. 혼자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그리고 자아의 침해에 대한 반발 에너지가 가장 강하며, 이것들은 모두 존재의 소멸에 대한 공포와 연결돼 있다. 

 

 

 

 

이런 공포를 오래 겪어온 사람은 신경증을 앓게 된다. 고립, 외로움, 억압을 뜨거운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에 비유해보자. 살이 이 뜨거운 주전자에 닿으면 재빨리 몸을 움츠려 피해야 한다. 하지만 삶의 공간을 선택할 수 없었던 유년기, 혹은 가난으로 인해 다른 삶을 살 여력이 없었던 경우, 피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까닭에 그는 계속 끓는 주전자에 마음의 살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자아의 한 부분은 그렇게 까맣게 타들어가고 말았다.

 

그는 연민의 눈길로 계속 그 상처를 응시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더라도 누군가 아주 살짝이라도 그 화상의 부위를 건드리면 강력한 반발의 에너지를 쏟아낸다. 강한 힘의 특성은 방향을 잡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엉뚱한 곳에 화를 내고 때로는 자기보다 약한 모든 방향으로 혐오 발언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것은 사방으로 폭발하듯 쏟아져 나와 모두를 피폐하게 만드는 붉은 용암과 같다. 

 

6. 

 

이런 관점으로 보면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구분할 수도 있다. 사랑은 한 인간에 대한 강력한 이끌림으로서 인력에 의한 정체 형성일까. 아니면 한 사람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과대평가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배척하는 척력의 힘일까. 

 

어느 쪽도 사랑이 아니다. 한 사람에 대한 강력한 인력은 흔하게 상대에 대한 집착과 통제로 나타난다. 이런 인력은 사랑이 아니라 자아의 확장을 통해 전능감을 느끼려는 본능적인 충동이다. 또한 상대나 가족을 돌보는 듯한 많은 모습도 가짜 사랑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자기 연인은 살뜰히 챙기되 그와 함께 간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을 하대하는 사람의 사랑은 두 사람의 병리적 자기애에 불과하다. 나아가 자기 자식만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다면 교육 기회의 균등은 필요 없다는 어떤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서너 사람의 자기애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에 대한 사랑일 뿐이어서, 다른 존재와 기대섬으로써 더 넓어지고 커지는 사랑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키운다. 나와 다른 그 사람의 독특한 개성,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의 세계, 사소한 취향과 습벽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존중하고 독려함으로써 그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성장하도록 만든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7. 

 

또한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든, 세상에 공헌하고자 하는 열망이든, 무언가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움직이며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것은, 오로지 자기에 의해 정체를 형성하는 사람만이 가진 능력이기도 하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타고난 독특한 정체성에 뿌리를 내리고 끝없이 새로운 세계를 틔워 올린다. 흐르는 강이 매일 새로운 물로 갈음하는 것처럼, 나무가 해마다 다른 모양의 잎들을 빚어내며 숲을 이루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이렇게 생산하고 관계 맺으며 우리의 회색빛 우주를 아름답게 물들인다.

 

 

 

 

 

 

 

 

나에 관해 생각하며 오래 고민한 주제였다.

내 안에서도 인력과, 척력과, 

그리고 나 자신이 작용하는 힘의 한가운데 

내 자아가 놓여 있음을 느낀다. 

어디에 자아의 형성을 맡길 것인가는 

결국 자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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