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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일기 ① 아지토

낮은 바다 2015. 5. 18. 00:19


관악산 자락에 작업실을 마련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오랫동안 꿈꿔온 나의 작업실. 이곳에서 첫 번째 글을 쓰고 있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책들도 다 들여놓았고 기본적인 가구나 집기들도 자리를 잡았다. 이 자리에 방을 구한 가장 큰 이유는 관악산 때문이었다. 관악산의 북쪽 사면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신림동의 수많은 영세한 건물들, 이곳은 그 중에서도 끝이다. 한번 올라올 때 등산할 마음을 먹어야하긴 하지만 덕분에 월세도 싸고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다. 서울 어디서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기계음들로부터 완벽에 가깝게 피신하는데 성공했다.


관악산의 조막만한 234봉 너머로 아침마다 해가 떠오른다. 그러면 동쪽을 향해 난 큰 창문으로 귀찮은 햇볕들이 질펀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웬만해서는 늦잠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햇볕의 쫀쫀한 결기. 순순히 따라 일어나 창문을 열고 산바람을 들이키며 하루를 시작한다. 자연의 흐름을 따라 밝을 땐 움직이고, 어두워지면 가만히 웅크리고 작업실 안에 틀어박힌다. 이곳은 특히 오후가 좋다. 오후에는 현관문을 열어놓으면 서쪽에서 져가는 해가 은은한 노란빛 양탄자를 바닥에 깔아놓는다. 조각조각 들어와 하나씩 사위어가는 그 오후의 질감이 좋다.


조용한 관악산이기 이전에 이 동네는 나의 아지트였던 곳이기도 하다. 학교 옆에 녹두거리라고, 내가 대학생활 내내 거의 살다시피 했던 곳이 있다. 그 녹두거리에는 우리가 흔히 '메인 스트리트'라고 불러왔던 곳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광대한 고시촌이 펼쳐지기에 앞서, 우리 학교 학생들이 주로 먹고 노는 골목을 우리는 메인 스트리트라고 불렀다. 5미터에 하나쯤은 누군가와의 추억과 이야기가 서려있는 그 골목을 따라 쭉 올라가면, 주변이 한산해지고 숨이 턱까지 차며 도대체 언제까지 올라가야하는거지? 라는 의문이 들 때쯤, 이 작업실이 있다.



이 길을 따라서 이 오르막이 끝날 때까지 걸어야...



여기 관악산 중턱에서 십 분만 걸어 내려가면 도시의 번잡함과 지나치게 빠른 삶의 리듬들이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다. 심리의 엔트로피는 높아지고 주의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것을 그러모으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자신이 하고자했던 웬만한 능동적 활동에는 돌입조차 못하는 것이 다수 도시인의 삶이다.


나 역시 매일 노동을 하는 노동자가 된 후로 마찬가지였다. 평일에 압력을 느끼며 노동을 했다는 그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심리가 주말쯤 되면 들끓는다. 내가 싫어하는 일이 아님에도 어떤 조직에 들어가 전체의 일부로 나를 맞춰 넣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다. 그러니 토, 일요일에 심리적 에너지를 잃고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렇게 서너 달쯤 지나니 문득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일주일에 이틀 정도, 내가 아예 다른 공간에 가 있을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살면서 "앞으로 열심히 살 거야!" 이렇게 뭔가 굳게 마음먹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일은 드물다. 그런 의지의 사나이들은 영화 속 아님 대기업 총수님들의 소설성 자서전에나 나오는 것 같다. 살면서 수백 번쯤 의지의 실패를 겪은 뒤 자학에 시달리다가 편법을 하나 깨달았는데, 때로는 내가 발 딛고 있는 상황을 바꾸는 것으로 간단히 문제가 해결될 때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둘 다 바꿔야 하는데 - 나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 고요하고 집중하기에 좋은 작업실에 가기로 한 것이다.



작업실 뒤편 234봉에 올라보니 서울 일대와 서울대학교가 두루두루 보인다.



어제는 산사람이 된 것처럼 관악산에 뛰어들어 한참 길이 아닌 곳을 뛰어다녔다. 면도도 안하고 시꺼먼 얼굴로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뛰어다녔으니 누가 보면 산에 사는 노숙자인줄 알았을 것이다. 길을 잃었다 싶어 식은땀이 날 때쯤 정말 예상치 못하게 이어진 길들을 발견하고 혼자서 환호하고, 아마 정해진 길을 따라다니는 등산객들은 느껴보지 못했을 아름다운 풍경도 맛보았다. 이게 다 작업실을 마련한 덕이다.


사람이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이 의식주라 한다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지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얼마 전 어떤 현대식 사극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제 거처로 삼아 드나드는 곳을 '아지토(我知土)'라고 표현해 놓은 것을 봤다. 재기발랄한 표현이면서도 아지트가 갖는 의미를 적절히 담아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아(我), 알 지(知), 흙 토(土). 아지토를 풀어 말하자면 '나를 알 수 있는 공간'쯤 된다.


조용한 공간에서 나는 생각할 시간이라는 걸 오랜만에 얻게 됐다. 소음이 제거된 세계에서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무들이 산바람에 조용하게 몸을 부비는 소리, 친근하게 느껴지는 새들이 이따금 지저귀는 소리,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노는 아이들 웃음소리... 이런 것들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삶을 살아있는 것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새롭게 불어넣어진 활력들이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고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들어 낼 힘을 준다.


여기에 가끔 도시 생활에 지친 한두 명 정도의 친구 선후배들을 불러야겠다. 다도하듯 정좌하고 앉아 술 한 잔씩 하며 그들에게도 휴식의 시간을 맛보게 해줄 수 있을 것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훈훈하니 좋다. 이제 내 블로그의 <작업실 일기>에는 작업실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산벌레들의 침투를 막기 위한 사투라든가, 나의 인테리어 감각이라든가, 뭐 이런 소소한 일들부터 주변 산길 소개까지. 혹은 여기서 쉬다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삶의 이야기까지.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작업실 뒤편의 산책로. 코스모스가 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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