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일상을 걷다 ]/깨어있기 (5)
오늘을 걷다
1. 영화 의 한 장면이다. 케빈은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들어찬 체육관의 입구를 몰래 자물쇠로 잠근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로 올라가 활을 난사해 수십 명을 죽인다. 수많은 영화에 인상 깊은 장면이 많았지만 나는 뒤이어 나오는 이 장면을 잊지 못한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많은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의 한가운데서, 피비린내가 낭자한 현장을 뒤로하고 케빈은 유유히 걸어 나온다. 복수의 대상인 엄마를 제외한 모든 가족도 죽인 후였다. 어떤 인간이 그토록 강력한 파괴 열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케빈은 그 모든 일이 끝나고 엄마와 대면한 자리에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한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는 것이다. ▲ 사람들을 죽인 후 체육관에서 ..
전북 김제의 모악산중에 위치한 산사에 도착하니 이미 산 구비구비 깊은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캄캄한 길을 걸어 숙소를 향해 가고 있자니 피로가 밀려왔다. 여기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는 사람의 발길이 없는 곳을 찾고 싶어서 무주의 해발 1000미터 산중에 있는 절에 템플스테이 예약을 했다. 그런데 내가 무주 터미널에 내릴쯤 그 절의 담당자가 문자를 하나 보내 왔다. 시설이 수리 중이어서 손님을 받을 수 없다는 날벼락 같은 얘기였다. 올해의 마지막 3일을 조용한 사찰에서 정리하고 싶어 먼 길을 내려왔는데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연신 미안해하는 그에게 주변의 다른 절을 알아봐줄 수 없냐고 물었고, 결국 이런저런 우연 끝에 모악산의 금산사로 오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에 스..
정글같은 느낌의 마당... 안으로 들어가면 심지어 아마존이 있다. 추석에 누나 집에 내려가 마당 한켠에 자리를 펴고 뒹굴거렸다. 볕 좋고 바람 시원한 오후였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많아서 모로 누워 한참 그 나무들을 바라봤다. 비슷비슷한 이파리들을 수백 개쯤 틔운 몸으로 여전히 하늘을 향해 맹렬히 뻗어가는 그 생명의 기세에 질릴 정도였다. 처음에는 조금 경이로운 생각이 들었다. 저이가 뿌리내린 작은 토양에서 약간의 양분 공급만으로 저렇게 거대한 생명체가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나무 마디마디를 가만히 살펴보는 와중에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은 생명활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종의 ‘반복'이었다. DNA에 각인된 매뉴얼에 따라 특정한 온도와 수분이 주어지면 똑같은 생산을 반복하는 것이다. 개별 이파리..
일곱 살쯤 먹었을 때였나. 유치원에서 학예회를 하던 날이었다. 선생님이 모든 아이들한테 하얀 면티와 하얀 바지를 맞춰 입고 오라고 얘기를 했다. 그날 유치원에 가니 모든 애들이 하얗게 옷을 맞춰 입고 왔는데, 나만 깜빡 잊고 노란 티에 파란 반바지를 입고 갔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혼자 다른 복장에 당혹스러웠던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다. 비슷한 일들이 학창 시절 내내 이어졌다. 중학교에 입학하고서는 담임선생님이 학생증에 들어갈 증명사진을 가져오라고 여러 차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만 마지막 날까지 흘려듣고서는 당일날 아침에 부랴부랴 준비한다는 것이, 웃기게도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있는 사진을 가위로 오려갔다. 그 종이 쪼가리를 들고 선생님이 얼마나 어이없어 했는지. 어쨌..
전화를 받은 것은 말년휴가 복귀 이틀 전이었다. 그 해 무더운 여름, 나는 정동의 어느 벤치에 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동이 울렸다. 혁재였다. 평소같이 까불대는 목소리를 기대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전혀 다르다. 순간 화면에 뜬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이 놈 맞나? 뭐냐 너, 하며 나는 웃었는데 녀석은 여전히 마른 목소리였다. 순간 안 좋은 느낌이 있었다. 잠깐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이윽고 혁재가 머뭇대며 한 친구의 이름을 말했다. 정철이가 순간 떠들썩한 거리의 소음과 행인들의 바쁜 발걸음이 의식 속에서 흐릿해졌다. 한동안 우리는 옅은 핸드폰의 잡음만을 들으며 침묵을 지켰다. 정철이가... 어쨌다구? 녀석에 대해 근래 들어왔던 몇 가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사람 마음을 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