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작업실 (5)
오늘을 걷다
작업실에 들어온 것이 올해 봄의 일이었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 이제 가장 추운 겨울에 와 있다. 네 계절 동안 작업실에 얽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그 동안 나는 새로운 친구라도 사귄 것처럼 '작업실'을 다루고 돌보는 노하우들을 얻었다. 볕이 가장 좋은 시간은 언제인지부터, 보일러 온도는 몇 도에 맞춰놓아야 있을 만한지, 잡벌레들의 출입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에어컨 청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같은 사소한 일들까지. 한 계절이 지날 때마다 책의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해야할 일과 생각해야 할 것이 몇 가지씩 늘어났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나서 몇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됐다. 무엇보다 작업실은 춥다. 바깥을 향해 난 창과 거실 사이에 베란다가 있어서 방풍과 보온을 해주는 나의 집과 달리, 이..
정오까지 뒹굴거릴 수 있게 해 주는 햇볕 차폐율 99%의 고성능 커튼 달콤한 3일 휴가 이번 주는 시작부터 평소보다 더 지치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주 야심차게 실험적으로 만들었던 방송이 기대만큼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그런 실험조차 무가치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더 기력이 빠져나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반짝 힘이 됐던 거라면 화요일 저녁 폴댄스를 갔다가 내가 사뿐 떠오르는 경험을 했다는 것 정도? 이 무거운 몸뚱아리때문에 매번 번뇌하다가 네 번째만에 두 손으로 봉을 잡고 몇 바퀴 우아하게(?) 돌았다. 내색 안 하고 쿨한척 했지만 실은 굉장히 기뻤다. 천사같이 예쁜 쌤이 박수치며 좋아할 때는 (약간) 우쭐하기도 했다. 그랬든 말든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출근을 해야 했고 이래저래 심란한 일들이 이..
작업실 소식 이제 작업실을 마련한지 세 달 정도가 지났다. 기본적으로 책이나 노트, 노트북, 혹은 가구 같은 것을 갖다 놓는 일은 봄이 다 지나기 전에 마무리했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이곳을 내가 보기에 충분히 멋지다 싶게 꾸미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은 구상한 것 가운데 무모하다 싶은 일부를 빼고는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었다. 커튼을 두 번 정도 바꿨다. 원래의 녹색 커튼은 뒷 배경에 보이는 산하고 느낌이 비슷하고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라 선택했는데, 녹색-연두색 안에도 수많은 컬러들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채도가 낮으니 약간 후진 느낌이 들었고 비슷한 색들이 연이어 보이는 것도 멋지지 않았다. 그냥 둘까 말까 고민하다가 한 달쯤 전인가, 그 커튼을 걷고 약간 진한 파란색 커튼을 다시 걸었다..
일곱 살쯤 먹었을 때였나. 유치원에서 학예회를 하던 날이었다. 선생님이 모든 아이들한테 하얀 면티와 하얀 바지를 맞춰 입고 오라고 얘기를 했다. 그날 유치원에 가니 모든 애들이 하얗게 옷을 맞춰 입고 왔는데, 나만 깜빡 잊고 노란 티에 파란 반바지를 입고 갔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혼자 다른 복장에 당혹스러웠던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다. 비슷한 일들이 학창 시절 내내 이어졌다. 중학교에 입학하고서는 담임선생님이 학생증에 들어갈 증명사진을 가져오라고 여러 차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만 마지막 날까지 흘려듣고서는 당일날 아침에 부랴부랴 준비한다는 것이, 웃기게도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있는 사진을 가위로 오려갔다. 그 종이 쪼가리를 들고 선생님이 얼마나 어이없어 했는지. 어쨌..
관악산 자락에 작업실을 마련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오랫동안 꿈꿔온 나의 작업실. 이곳에서 첫 번째 글을 쓰고 있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책들도 다 들여놓았고 기본적인 가구나 집기들도 자리를 잡았다. 이 자리에 방을 구한 가장 큰 이유는 관악산 때문이었다. 관악산의 북쪽 사면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신림동의 수많은 영세한 건물들, 이곳은 그 중에서도 끝이다. 한번 올라올 때 등산할 마음을 먹어야하긴 하지만 덕분에 월세도 싸고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다. 서울 어디서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기계음들로부터 완벽에 가깝게 피신하는데 성공했다. 관악산의 조막만한 234봉 너머로 아침마다 해가 떠오른다. 그러면 동쪽을 향해 난 큰 창문으로 귀찮은 햇볕들이 질펀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웬만해서는 늦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