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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 @ 무장한 예술가들의 전쟁 본문

■ [ 일상을 걷다 ]/일상의 여행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 @ 무장한 예술가들의 전쟁

낮은 바다 2016. 2. 23. 04:00


2월 10일의 강제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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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끝나가는 한가한 오후에 한남동의 친숙한 카페를 찾았다. 이 카페는 이미 입구부터 평범한 느낌이 아니다. 들어오지 말라고 일부러 설치해놓은 듯한 비닐 구조물이 입구가 어디인지 모르게 만들고, 문을 열자마자 가로막는 드높은 철골 기둥은 그나마 들어선 입장객들마저 당황하게 하기 일수다. 실험적인 도시 미술관 같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피난처 같기도 한, 어수선하면서도 강렬한 개성이 느껴지는 카페 곳곳에 멋스러운 젊은이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요 며칠 카페 돌아가는 사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앉아있는데 갑자기 한쪽에서 공연이 시작된다. <강제음악회>를 기획한 이권형이 소환한 두 명의 뮤지션들이 있는 힘껏 노래를 불렀다. 미술관에 와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디 밴드의 노래를 듣는 경험. 그러다 2층에 올라가 새로 알게 된 사람들과 특이한 보드게임을 몇 판 했다. 얼마 후 출출할 즈음 누군가 남은 재료만 썼다면서 해산물 파스타를 만들어 내왔다. 다들 솜씨 칭찬을 자자하게 늘어놓았고 나는 세 접시를 비웠다. 그렇게 머물다가 깊은 밤 카페를 나섰다. 


어떤 공간이 평범하게 흘러갔을 나의 하루를 자신의 색깔로 물들였다. 그 색은 그 카페의 유리문을 투과해 들어왔던 금빛의 햇살 같기도 했고 어느 이국의 붉은 축제 같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가능한 공간, 바로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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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전공한 두 자매가 꿈을 꿨다. 자체적으로 비용을 조달하면서도 예술가들이 대중과 같이 호흡할 수 있는 도시 미술관을 만들어야겠다는 꿈. 그래서 형식은 카페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카페의 벽면, 계단, 테이블, 심지어 음료 메뉴까지 포함한 모든 재료와 공간들이 예술가에게 작업 겸 전시 공간으로 제공되고, 관객이자 카페의 손님들은 그런 작업들을 처음부터 함께 지켜본다. 


예술가들의 작업을 대중들 안에 녹아들어 가게 만들 수 있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를 만드는 일. 게다가 재정적으로 자립해서 많은 신생 예술가들에게 작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최소연, 최지안 두 사람은 이런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오래 머물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멋진 공간을 만들었고 대중의 충분한 호응까지 얻었다고 해서 꿈을 이룬 건 아니다. 엉뚱하게도 마지막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입주공간의 건물주다. 공간이 이름을 얻어 유동인구가 늘어나면, 월세를 더 받고 싶은 건물주는 그 공간을 꾸려온 세입자를 쫓아내고 프랜차이즈 카페를 들이거나 재건축을 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된다. 두 사람은 이미 대학로와 성북동에서 비슷한 꿈을 실현하기 직전 두 번이나 쫓겨난 적이 있었다. 어떻게 건물주를 극복할 것인가. 두 사람의 고민은 하나였다.


6년 전. 그러다 겨우 발견한 곳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한남동 주변부의 오래된 건물이었다. 15년째 고깃집이 있었고 건물주는 특이하게도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건물주는 그들 국가의 방식으로 “원하면 언제까지든 재계약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두 자매는 척박한 도시에 주어진 작지만 영속적인 공간에서 도시 미술관의 꿈을 조심스럽게 펼쳐놓게 되었다.




정상 운영 중일 때의 테이크아웃드로잉 ⓒ테이크아웃드로잉


드로잉의 음료 메뉴 <햇살 다람쥐>. 메뉴도 참여 예술가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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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카페 겸 도시미술관이 바로 한남동의 <테이크아웃드로잉>(이하 ‘드로잉’)이다. 입주 작가의 작품 세계를 카페의 음료 콘셉트로 녹여내 젊은 도시남녀들의 이목을 끌었고, 감각 있는 젊은 예술가들이 자기 집 같은 정성으로 꾸민 전시물과 장식 하나하나가 신이한 매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 등장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상업적 성공뿐 아니라 예술적 실험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한국예술계의 기적"이라는 평가까지 받은 드로잉. 대학로에서 최초의 실험이 시작된 이후 10여 년간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생산하고 순환해온 한국의 유일한 미술관으로 평가받은 드로잉은 이제 예술계 안에서도 중요한 브랜드가 되었다. 이제 이 실험을 성공한 실험이라고 평가하려는 찰나, 문제가 생겼다. 건물주가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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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이 명소가 되었던 6년여 시간 동안 건물 가치는 비약적으로 올라갔다. 이태원 일대 유동인구가 늘면서 한남동 지역까지 지가가 올라간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드로잉이 이목을 끈 덕분이었다. 시세가 30~40억 원 정도였던 건물 가격은 일본인 건물주가 그 다음 주인에게 팔 때 63억으로 올랐고, 지금의 건물주 싸이가 살 때는 78억으로 뛰었다. 그리고 불과 4년여 만에 시세는 130~140억 정도로 급등했다.


건물주가 된 싸이는 법적 대리인을 내세워 드로잉에 둥지를 튼 예술가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의도는 어느 사업가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쫓아내고 재건축을 하든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를 들이든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던 것이다. 문화에 기대 돈을 번 싸이는 자신이 축적한 자본을 증식하기 위해 골몰하는 전형적인 자본가로 현현해 브라운관 바깥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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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를 무조건 탐욕스러운 건물주라고 매도하는 것은 섣부르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싸이나 양현석 같은 이들이 더는 문화창작자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창작하는 문화는 자본 증식의 수단이며 그들은 돈을 벌 만한 노래와 퍼포먼스를 기획한다.


이렇게 읽어보면 건물주로서 그들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다. 연예인이든 벼락부자든 근로소득자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이상 누구든 좀 더 안정적인 재산의 기반을 만들고 싶어 한다. 소득과 자산이 적은 사람은 개미투자자가 되어 주식시장에 들어가고, 그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아파트를 사고, 더 많은 사람은 빌딩을 산다. 부동산 불패 신화가 빛나는 한국 사회에서 소득이 늘어나는데 아파트와 빌딩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다.


제아무리 고소득자라 하더라도 그의 자본이 금고에만 있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자본은 자신을 새로운 것과 교환해가며 덩치를 키울 때만 가치를 갖는다. 암세포가 그러하듯 재생산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자본의 운동성이며 증식에 방해되는 것은 동화시키거나 제거한다. 경영 위기를 과장하는 대기업의 정리해고, 건물주의 세입자 퇴거조치, 재개발로 인한 주민 철거가 모두 마찬가지 맥락으로 일어난다.


자본가는 자본의 운동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지폐인형이다. 교육자든 사업가든 연예인이든 자본을 소유하는 이상 그의 영혼은 자본의 본능을 따른다. 문화 대통령이라는 싸이도 그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




철거 용역들의 입구 진입을 막을 겸 설치해 둔 철골기둥.


같은 목적으로 설치한 비닐 구조물. 지금은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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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의 예술가들이 원하는 것은 시간이다. 금전과 교환할 수 없는 지난 6년의 시간. 최초의 실험을 일으키고 그 취지에 동참한 예술가들이 뜻을 모으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며 겨우 뿌리내린 한남동 683-139번지 땅 위에서의 시간. 


그리고 그곳에 뿌리내린 단단한 나무를 중심으로 6년간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퍼져나가 이어진 예술가들과 거주민들과 관객들과의 생동하는 관계. 구심의 공간이 뿌리뽑히면 그 관계의 망이 가운데부터 샅샅이 끊어진다. 관계의 단절은 드로잉을 사랑하고 가꿔온 6년을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의 가없는 시간을 잃는 일이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곧 관계지만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돈이다. 양쪽의 세계는 서로 이해되지 않는다. 시간을 돈으로만 환산할 수 있는 건물주는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불법 점유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작년 여름 강제집행 후, 텅빈 드로잉 1층 ⓒ박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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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노화에 대한 자본의 대응은 주로 기존의 삶터를 무너뜨리는 재개발이었다. 하지만 문래동, 연남동, 이태원 등지에서 이뤄져 온 예술가들의 플레이스 메이킹(Place making)은 노화된 터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는 존중과 공존의 방식이었다. 많은 낡은 마을과 거리가 그들의 노동으로 새롭게 태어나 젊은이들의 순례지로 거듭났다.


하지만 우리의 법과 제도는 항상 자본의 방식만을 지원한다. 벽돌 더미에 불과한 육면의 물체를 문화적 가치가 깃든 살아있는 공간으로 색을 입히는 것은 건물의 이용자들이지만, 우리의 법체계는 건물주의 재산권만을 신성하게 다룬다. “임차인이 영업하는 공간에 찾아오는 많은 단골의 행복추구권이 있으므로 건물주가 개인의 재산권만을 행사하는 것이 옳지 않다”며 임차인의 권리를 보장한 프랑스의 판례를 한국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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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이 지켜주지 않는 삶터는 당사자들이 사적 물리력을 조직해 지킬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뜻밖에도 여기 도시 미술관에서 과거 거리 시위판에서나 겪어봤던 사수대를 만났다. 건물주의 요구와 법원의 지시로 이뤄지는 강제집행이라는 합법적이고 압도적인 폭력으로부터 드로잉을 지키려는 예술가 사수대였다. 


그들은 조를 짜 교대를 하며 드로잉에서 숙식을 하고 있다. 이미 수차례 급작스러운 침탈이 일어나 운영진이 부상을 당하거나 설비가 부서졌다. 한때 도시에서 전례 없는 멋진 실험을 벌였던 이들이 이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피습에 대한 공포가 극대화되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공간을 지킨 사람들은 같이 아침을 먹는다 ⓒ최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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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장한 예술가들이 오늘도 그곳에서 전투를 준비한다.


저항. 권력이 과잉 행사되는 곳에서 발견되는 저항. 지금까지 도시의 철거민, 해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쫓겨나게 된 건물 위에 망루를 짓거나 공장 밖에 천막을 지어 진지를 구축했다. 그렇다면 그 쫓겨남의 당사자가 예술가들이 되었을 때 저항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진지는 어떻게 구축될까.


소설가, 음악가, 사진작가, 미술가, 다큐감독. 그들의 저항은 다소 코믹하면서도 유려하다. 물리력 대 물리력의 싸움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그 물리력의 연대를 조직하는 방식이 새롭다. 소설가는 싸이의 변호사가 소송장에 써넣은 황당한 문구들을 끌어와 사람들과 함께 <소송문학>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낭독회를 열고, 경찰 소환장을 받은 음악가는 다른 음악가에게 <강제소환장>을 날려 소환의 폭력성을 비틀며 연대의 음악회를 연다. 


싸이 측이 물리력을 동원하는 방식이 돈을 주고 대량의 사람을 구입하는, 문화대통령 치고는 다소 '후진' 형식인 데 비해, 여기 예술가들이 물리력을 조직하는 방식은 그에 비하자면 세련됐고 조금 더 '문화적'이다. 그 덕에 그들의 진지는 지금까지 수많은 퇴거인들의 여느 진지와 달리 비장미 이상의 흥겨움이 묻어난다. 




2월 20일에는 한받의 강제음악회가 있었다.


소송문학 낭독회에서 읽혀진 싸이측 변호사의 소장.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는 법정에 앉아 있었지만, 휴식을 즐기는 사람처럼 의자를 뒤로 제친 채 마치 원고의 주장에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반쯤 누워있었다."


소송문학 낭독회를 연 소설가 윤영



최소연 대표. 


드로잉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는 정용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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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곳에는 여러 예술가들의 전시와 공연이 열린다. 해고, 철거, 퇴거 등 자본이 도시 곳곳에서 벌이는 밀어내기의 폭력에 맞선 약자들의 진지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를 목격하고 싶다면 오늘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에 가보면 된다. 전선의 비장미보다는 무대의 유흥미가 흐르는 카페에 가서 어울리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각성에 이르게 되리라. 이 공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이름난 건물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진지하게 자신들의 예술을 펼쳐 보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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