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걷다
관악산 자락에 작업실을 마련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오랫동안 꿈꿔온 나의 작업실. 이곳에서 첫 번째 글을 쓰고 있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책들도 다 들여놓았고 기본적인 가구나 집기들도 자리를 잡았다. 이 자리에 방을 구한 가장 큰 이유는 관악산 때문이었다. 관악산의 북쪽 사면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신림동의 수많은 영세한 건물들, 이곳은 그 중에서도 끝이다. 한번 올라올 때 등산할 마음을 먹어야하긴 하지만 덕분에 월세도 싸고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다. 서울 어디서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기계음들로부터 완벽에 가깝게 피신하는데 성공했다. 관악산의 조막만한 234봉 너머로 아침마다 해가 떠오른다. 그러면 동쪽을 향해 난 큰 창문으로 귀찮은 햇볕들이 질펀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웬만해서는 늦잠을..
구약성경의 욥기는 신에 대한 순결하고 단단한 믿음을 가졌던 욥(Job)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날 사탄은 야훼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가장 신실한 인간인 욥에게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더라도 지금과 같은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야훼는 사탄과의 내기에 응한다. 이에 욥은 갑자기 자식들과 재산을 잃고, 결국 온 몸이 부스럼에 시달리며 건강까지 잃게 된다. 그렇게 고통에 시달리는 욥에게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처음에 욥을 위로하던 친구들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결국 그들은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며 욥을 몰아붙인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하는 이런 태도는 현실에 대한 상징으로 느껴진다. 세월호 유족들은 한때 친구처럼 그들을 위로하던 정치인과 주변 사..
전화를 받은 것은 말년휴가 복귀 이틀 전이었다. 그 해 무더운 여름, 나는 정동의 어느 벤치에 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동이 울렸다. 혁재였다. 평소같이 까불대는 목소리를 기대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전혀 다르다. 순간 화면에 뜬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이 놈 맞나? 뭐냐 너, 하며 나는 웃었는데 녀석은 여전히 마른 목소리였다. 순간 안 좋은 느낌이 있었다. 잠깐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이윽고 혁재가 머뭇대며 한 친구의 이름을 말했다. 정철이가 순간 떠들썩한 거리의 소음과 행인들의 바쁜 발걸음이 의식 속에서 흐릿해졌다. 한동안 우리는 옅은 핸드폰의 잡음만을 들으며 침묵을 지켰다. 정철이가... 어쨌다구? 녀석에 대해 근래 들어왔던 몇 가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사람 마음을 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