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분류 전체보기 (13)
오늘을 걷다
안녕하세요. 부탄 여행기를 올린지도 꽤 되었는데, 여전히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블로그를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브런치로 옮기고 있습니다. 오늘부로 부탄 여행기도 티스토리에서는 닫고, 브런치에서만 공개하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부탄 여행기를 비롯해 제가 새로쓰는 글들 모두 낮은바다 브런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1. 영화 의 한 장면이다. 케빈은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들어찬 체육관의 입구를 몰래 자물쇠로 잠근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로 올라가 활을 난사해 수십 명을 죽인다. 수많은 영화에 인상 깊은 장면이 많았지만 나는 뒤이어 나오는 이 장면을 잊지 못한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많은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의 한가운데서, 피비린내가 낭자한 현장을 뒤로하고 케빈은 유유히 걸어 나온다. 복수의 대상인 엄마를 제외한 모든 가족도 죽인 후였다. 어떤 인간이 그토록 강력한 파괴 열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케빈은 그 모든 일이 끝나고 엄마와 대면한 자리에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한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는 것이다. ▲ 사람들을 죽인 후 체육관에서 ..
2월 10일의 강제음악회 #연휴가 끝나가는 한가한 오후에 한남동의 친숙한 카페를 찾았다. 이 카페는 이미 입구부터 평범한 느낌이 아니다. 들어오지 말라고 일부러 설치해놓은 듯한 비닐 구조물이 입구가 어디인지 모르게 만들고, 문을 열자마자 가로막는 드높은 철골 기둥은 그나마 들어선 입장객들마저 당황하게 하기 일수다. 실험적인 도시 미술관 같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피난처 같기도 한, 어수선하면서도 강렬한 개성이 느껴지는 카페 곳곳에 멋스러운 젊은이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요 며칠 카페 돌아가는 사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앉아있는데 갑자기 한쪽에서 공연이 시작된다. 를 기획한 이권형이 소환한 두 명의 뮤지션들이 있는 힘껏 노래를 불렀다. 미술관에 와서 커피를 ..
전북 김제의 모악산중에 위치한 산사에 도착하니 이미 산 구비구비 깊은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캄캄한 길을 걸어 숙소를 향해 가고 있자니 피로가 밀려왔다. 여기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는 사람의 발길이 없는 곳을 찾고 싶어서 무주의 해발 1000미터 산중에 있는 절에 템플스테이 예약을 했다. 그런데 내가 무주 터미널에 내릴쯤 그 절의 담당자가 문자를 하나 보내 왔다. 시설이 수리 중이어서 손님을 받을 수 없다는 날벼락 같은 얘기였다. 올해의 마지막 3일을 조용한 사찰에서 정리하고 싶어 먼 길을 내려왔는데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연신 미안해하는 그에게 주변의 다른 절을 알아봐줄 수 없냐고 물었고, 결국 이런저런 우연 끝에 모악산의 금산사로 오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에 스..
작업실에 들어온 것이 올해 봄의 일이었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 이제 가장 추운 겨울에 와 있다. 네 계절 동안 작업실에 얽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그 동안 나는 새로운 친구라도 사귄 것처럼 '작업실'을 다루고 돌보는 노하우들을 얻었다. 볕이 가장 좋은 시간은 언제인지부터, 보일러 온도는 몇 도에 맞춰놓아야 있을 만한지, 잡벌레들의 출입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에어컨 청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같은 사소한 일들까지. 한 계절이 지날 때마다 책의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해야할 일과 생각해야 할 것이 몇 가지씩 늘어났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나서 몇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됐다. 무엇보다 작업실은 춥다. 바깥을 향해 난 창과 거실 사이에 베란다가 있어서 방풍과 보온을 해주는 나의 집과 달리, 이..
정오까지 뒹굴거릴 수 있게 해 주는 햇볕 차폐율 99%의 고성능 커튼 달콤한 3일 휴가 이번 주는 시작부터 평소보다 더 지치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주 야심차게 실험적으로 만들었던 방송이 기대만큼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그런 실험조차 무가치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더 기력이 빠져나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반짝 힘이 됐던 거라면 화요일 저녁 폴댄스를 갔다가 내가 사뿐 떠오르는 경험을 했다는 것 정도? 이 무거운 몸뚱아리때문에 매번 번뇌하다가 네 번째만에 두 손으로 봉을 잡고 몇 바퀴 우아하게(?) 돌았다. 내색 안 하고 쿨한척 했지만 실은 굉장히 기뻤다. 천사같이 예쁜 쌤이 박수치며 좋아할 때는 (약간) 우쭐하기도 했다. 그랬든 말든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출근을 해야 했고 이래저래 심란한 일들이 이..
정글같은 느낌의 마당... 안으로 들어가면 심지어 아마존이 있다. 추석에 누나 집에 내려가 마당 한켠에 자리를 펴고 뒹굴거렸다. 볕 좋고 바람 시원한 오후였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많아서 모로 누워 한참 그 나무들을 바라봤다. 비슷비슷한 이파리들을 수백 개쯤 틔운 몸으로 여전히 하늘을 향해 맹렬히 뻗어가는 그 생명의 기세에 질릴 정도였다. 처음에는 조금 경이로운 생각이 들었다. 저이가 뿌리내린 작은 토양에서 약간의 양분 공급만으로 저렇게 거대한 생명체가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나무 마디마디를 가만히 살펴보는 와중에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은 생명활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종의 ‘반복'이었다. DNA에 각인된 매뉴얼에 따라 특정한 온도와 수분이 주어지면 똑같은 생산을 반복하는 것이다. 개별 이파리..
작업실 소식 이제 작업실을 마련한지 세 달 정도가 지났다. 기본적으로 책이나 노트, 노트북, 혹은 가구 같은 것을 갖다 놓는 일은 봄이 다 지나기 전에 마무리했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이곳을 내가 보기에 충분히 멋지다 싶게 꾸미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은 구상한 것 가운데 무모하다 싶은 일부를 빼고는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었다. 커튼을 두 번 정도 바꿨다. 원래의 녹색 커튼은 뒷 배경에 보이는 산하고 느낌이 비슷하고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라 선택했는데, 녹색-연두색 안에도 수많은 컬러들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채도가 낮으니 약간 후진 느낌이 들었고 비슷한 색들이 연이어 보이는 것도 멋지지 않았다. 그냥 둘까 말까 고민하다가 한 달쯤 전인가, 그 커튼을 걷고 약간 진한 파란색 커튼을 다시 걸었다..
6월 어느날에 갔던 봉평장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평창에 갔다가 우연히 봉평장이 있다는 걸 알게 돼서 이곳에 왔다. 아무 계획도 없이 온 여행에서 이런 걸 발견하면 횡재한 기분. 2일, 7일마다 열리는 5일장인데 운 좋게 내가 갔던 날에 장이 열린 것이다. 장터의 들머리 쯤에서 뭔가 신기한 걸 발견했다. 장터의 소식지가 있었다. 장터 스탬프와 장터 로고, 곳곳의 예쁜 간판들까지... 젊은이들의 심상찮은 실력이 느껴졌다. 누가 여기에 와서 이런 마법을 부려놓고 갔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검색하지 않았다. 일단은 경험. 가게마다 다니면서 이렇게 봉평장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손바닥에 찍든 이마에 찍든 엉덩이에 찍든 자기 멋대로 하면 됨. 이런 걸 보면서 맛집의 비결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이 바글대는 음식점..
일곱 살쯤 먹었을 때였나. 유치원에서 학예회를 하던 날이었다. 선생님이 모든 아이들한테 하얀 면티와 하얀 바지를 맞춰 입고 오라고 얘기를 했다. 그날 유치원에 가니 모든 애들이 하얗게 옷을 맞춰 입고 왔는데, 나만 깜빡 잊고 노란 티에 파란 반바지를 입고 갔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혼자 다른 복장에 당혹스러웠던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다. 비슷한 일들이 학창 시절 내내 이어졌다. 중학교에 입학하고서는 담임선생님이 학생증에 들어갈 증명사진을 가져오라고 여러 차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만 마지막 날까지 흘려듣고서는 당일날 아침에 부랴부랴 준비한다는 것이, 웃기게도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있는 사진을 가위로 오려갔다. 그 종이 쪼가리를 들고 선생님이 얼마나 어이없어 했는지. 어쨌..
관악산 자락에 작업실을 마련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오랫동안 꿈꿔온 나의 작업실. 이곳에서 첫 번째 글을 쓰고 있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책들도 다 들여놓았고 기본적인 가구나 집기들도 자리를 잡았다. 이 자리에 방을 구한 가장 큰 이유는 관악산 때문이었다. 관악산의 북쪽 사면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신림동의 수많은 영세한 건물들, 이곳은 그 중에서도 끝이다. 한번 올라올 때 등산할 마음을 먹어야하긴 하지만 덕분에 월세도 싸고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다. 서울 어디서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기계음들로부터 완벽에 가깝게 피신하는데 성공했다. 관악산의 조막만한 234봉 너머로 아침마다 해가 떠오른다. 그러면 동쪽을 향해 난 큰 창문으로 귀찮은 햇볕들이 질펀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웬만해서는 늦잠을..
구약성경의 욥기는 신에 대한 순결하고 단단한 믿음을 가졌던 욥(Job)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날 사탄은 야훼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가장 신실한 인간인 욥에게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더라도 지금과 같은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야훼는 사탄과의 내기에 응한다. 이에 욥은 갑자기 자식들과 재산을 잃고, 결국 온 몸이 부스럼에 시달리며 건강까지 잃게 된다. 그렇게 고통에 시달리는 욥에게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처음에 욥을 위로하던 친구들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결국 그들은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며 욥을 몰아붙인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하는 이런 태도는 현실에 대한 상징으로 느껴진다. 세월호 유족들은 한때 친구처럼 그들을 위로하던 정치인과 주변 사..
전화를 받은 것은 말년휴가 복귀 이틀 전이었다. 그 해 무더운 여름, 나는 정동의 어느 벤치에 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동이 울렸다. 혁재였다. 평소같이 까불대는 목소리를 기대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전혀 다르다. 순간 화면에 뜬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이 놈 맞나? 뭐냐 너, 하며 나는 웃었는데 녀석은 여전히 마른 목소리였다. 순간 안 좋은 느낌이 있었다. 잠깐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이윽고 혁재가 머뭇대며 한 친구의 이름을 말했다. 정철이가 순간 떠들썩한 거리의 소음과 행인들의 바쁜 발걸음이 의식 속에서 흐릿해졌다. 한동안 우리는 옅은 핸드폰의 잡음만을 들으며 침묵을 지켰다. 정철이가... 어쨌다구? 녀석에 대해 근래 들어왔던 몇 가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사람 마음을 읽을..